책 리뷰 바우웬스 & 코스타키스, «네트워크 사회와 협력 경제를 위한 미래 시나리오» 2018/10/05 12:31 by 아콩카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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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P 생산은 자본주의 내부의 사회적 진보이지만 보호하고 강화하고 자극하고 진보적인 사회운동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는 다양한 탈자본주의적 측면과 함께 보아야 한다. 전환점의 한가운데서, 마침 우리가 지지했던 지속가능한 대안이 자본주의적 기회주의의 족쇄를 깨부수고 인간 정신의 더 훌륭한 측면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경제의 도래를 알릴 때가 무르익었다. 자본의 축적을 공유지의 완전한 순환으로 대체해야 할 때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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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사회와 협력 경제를 위한 미래 시나리오» 소개

저자들은 오늘날 생태 위기와 가치의 위기를 야기하면서 지속가능성 자체를 의심 받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대안으로 ‘협력 경제’를 제시하고 있다. 생태 위기는 산업자본주의 정치경제가 전제로 삼고 있는 두 가지 역설적인 가정에서 기인한 것이다. 지구는 자원과 생태적 수용능력이 한정되어 있는 행성임에도 우리는 마치 지구가 무한정 풍요로운 곳인 것처럼 생각하며 개발과 경제 성장에만 치중해 왔다. 그 결과로 지구는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같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생태 위기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일은 지식과 정보가 마치 희소한 자원인 것처럼 여기며 거기에 울타리를 치는 지적재산권에 의해 저지되고 있다. 어쩌면 인류는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한편 가치의 위기는 인지자본주의 가치 모델에서 기인한다. 디지털 플랫폼들이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무보수 기여 활동에서 교환 가치를 뽑아내면서도 가치의 직접적 생산자인 사용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위기다. 네이버, 다음, 유투브, 구글, 페이스북 같은 곳들이 천문학적 수익을 올리는 방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플랫폼들은 사람들이 P2P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지만, 플랫폼을 구성하는 기술적 층위에서는 사람들이 생산한 콘텐츠나 주목(attention)을 돈으로 바꿔낸다. 또한, 이 과정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고자 플랫폼의 설계를 통해 어떤 행동은 할 수 없도록 하는 동시에 특정한 행위는 더 많이 하도록 유도한다.

P2P란 Peer-to-peer의 줄임말로 직역하면 “동료(또래)에서 동료(또래)로”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흔히 인터넷 기반 파일 공유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초기 인터넷이 P2P 형태를 취했다. 저자에 따르면 “P2P는 의사소통에 참여하는 두 당사자가 서로 동일한 능력을 갖는 의사소통 네트워크로 정의”할 수 있고, “분산형 네트워크에서 출현하는 관계 역학”이다. 요차이 벤클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공유지 기반 P2P 생산이 시장의 부속물 같은 것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주목한다.

『네트워크 사회와 협력 경제를 위한 미래 시나리오』의 저자들은 생태 위기와 가치 위기를 가져온 산업자본주의와 인지자본주의의 가치 모델과 경쟁하면서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서 지배력을 갖기 위해 부상 중인 “공유지에 기반한 성숙한 P2P 생산 모델(CBPP)”에 주목한다. 이 책은 P2P 생산이 점점 더 생산의 일반적인 양식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P2P 생산이 인지자본주의 가치 모델에 포섭되지 않고 공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P2P 생산의 기술적, 법적, 문화적 인프라를 활용해 자본주의 경제의 대안이 될 ‘협력 경제’로 이행하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계획을 제안하는 것이다. P2P 생산은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출현한 현상이므로, 저자들은 이를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행 계획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기술 낙관론자들과 달리 P2P 기술이 이행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P2P 생산이 기존 소유권 체제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성과가 개인이나 소수에게 귀속되고 결국 자본의 회로에 갇히는 일은 너무나 흔하기 때문이다. IBM이라는 거대 기업의 성장을 도운 리눅스가 그 사례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특히 긴급한 것은 오늘날 그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기존의 독점적인 지적재산권법 및 저작권법을 대체할 P2P적 소유권 체계라고 강조한다. P2P적 소유권 체계란 공유지에 기여하는 사람 또는 공유지에 기여하는 기업은 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P2P 생산 라이선스와 같은 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이 대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P2P 생산 라이선스는 『텔레코뮤니스트 선언』(갈무리, 2014)의 저자 드미트리 클라이너가 제안한 것으로, “상업적 이용은 허용하지만, 그 근간에는 호혜성에 대한 요구가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해당 라이선스 및 공유지에 기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기여하지 않고 사용하기만 하려는 영리 기업들에는 라이선스 비용을 청구한다.”(264쪽)

공유지에 기반한 성숙한 P2P 생산 가치 모델을 위한 미시적 조건이 P2P 생산 라이선스 같은 제도라면,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저자들은 ‘파트너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파트너 국가는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국가’와 대조적이다. 파트너 국가는 공유지의 영역을 보호하고, 공유지를 지향하는 기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하며, 시민들이 주도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네트워크 사회와 협력 경제를 위한 미래 시나리오』는 길이가 그다지 길지 않은 책임에도 새로운 생산양식과 가치 모델로 이행하기 위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요소 대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맑스주의와 슘페터리안의 시각을 통합하여 기술-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점’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중반부에서는 구글, 페이스북, IBM, 에어비앤비, 킥스타터 등의 잘 알려진 플랫폼 기업들이 어떤 가치 모델을 따르고 있는지를 한눈에 그려 보이면서, 이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 내부의 대안적 가능성까지 짚어내고 있다. 책의 후반부에 저자들이 제시하는 이행 계획은 앞으로 새로운 가치 모델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굵직한 요소들을 짚어주고 있다. 특히 공유지를 지향하는 P2P 생산 가치 모델과 지역에서 활동하는 회복탄력성 공동체와 지식, 코드, 디자인 등을 주 대상으로 삼는 인터넷상의 지구적 공유지를 함께 다루는 것이 이 책의 특별한 점이다.

한국은 급속한 경제 발전 과정에서 산업자본주의와 인지자본주의 가치 모델의 모순을 고스란히 안은 채, 지금은 다시 4차 산업혁명 담론과 함께 새로운 기술적 국면을 맞고 있다. 언론은 4차 산업혁명의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유전공학, 나노공학, 로보틱스 등의 기술이 일자리의 대부분을 사라지게 만들지도 모른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플랫폼을 매개로 한 불안정 노동에 내몰리고 있으며, 플랫폼 기업들은 단지 플랫폼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배달 노동자, 디자이너, 콘텐츠 생산자들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획득하는 중이다. 이런 한국의 상황에서 미셸 바우웬스와 바실리스 코스타키스의 이행 계획은 그저 듣기 좋은 소리라기보다는 정말로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한 조언이자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저자 소개

미셸 바우웬스 (Michel Bauwens, 1958~ )

P2P 재단의 창립자, 대표, P2P 이론가. 기술과 문화, 사회혁신을 탐구하는 연구자, 저술가다. 전 세계 연구자들과 P2P 생산과 거버넌스, 재산권에 대해 연구한다. 2014년 에콰도르 정부의 공유지 이행 계획을 개발한 FLOK 소사이어티 연구 책임자였다. P2P와 공유지를 새롭게 출현하는 패러다임이자 탈자본주의적 세계로 가기 위한 기회로 보면서 워크숍과 강연을 계속해 왔다. 현재 태국 치앙마이에서 연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저서로 『네트워크 사회와 협력 경제를 위한 미래 시나리오』(갈무리, 2018), 『탈자본주의를 위한 P2P로 세상을 구하라』(공저, 2013) 등이 있고 P2P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바실리스 코스타키스(Vasilis Kostakis, 1985~ )

P2P 연구소의 창립자이자 P2P Foundation의 핵심 멤버다. 2016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디지털 커뮤니티 부문 골든니카상(Golden Nica for Digital Communities)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유럽 연구위원회로부터 디지털 공유지와 지역 제조업 기술의 융합에 대한 4년 연구 보조금을 수여했다. 학자, 활동가, 사회 혁신가 등으로 구성된 학제간 연구팀과 함께 디지털 기술로 상호 연결된 지속가능한 지역 공동체 기반 경제에 관해 연구중이다. P2P 생산과 데스크톱 제조업, 디지털 공유지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책 속에서

한국은 현재 지구상에서 디지털로 가장 촘촘히 서로 얽혀 있는 국가이자, 동시에 독재 권력에 저항해 온 역사를 지닌 나라이기에 우리의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나온다는 점은 특별히 기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12쪽

비트코인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코드일 뿐이기 때문에 다른 통화들이 겪는 문제를 전혀 겪지 않는 “무당파적인 통화”(Varoufakis, 2013)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비트코인에 새롭게 떠오르는 거버넌스 구조의 징후가 있다는 사실 외에도, 비트코인의 전체 논리가 다른 통화들의 주요 규칙을 따르는 것 역시 볼 수 있다.
― 5장 분산형 자본주의, 68쪽

전통적인 소유권의 이해와 대조되는 공유지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누구도 어떤 특정한 자원을 배타적으로 사용하거나 처분할 수 있는 통제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Benkler, 2006).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것들과 달리, 공유지는 전통적 의미에서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다(The Ecologist, 1994, p. 109).
― 3부 성숙한 P2P 생산의 가설적 모델, 81쪽

맑스(Marx, 1979)가 상업 자본주의와 공장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가 봉건 질서 내부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새로운 생산 양식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발전 중이다. 다시 말해 시스템의 변화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즉 ‘사회주의적’ 대안이 아닌 공유지 기반의 방식으로 다시 의제에 오른다.
― 8장 지구적 공유지, 105쪽

P2P 생산 라이선스와 같은 공유지에 기반한 호혜주의적 라이선스가 단지 가치의 재분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양식의 변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는 일은 중요하다. … 과거의 이행과 마찬가지로, 최초 대항 경제의 존재와 대항 헤게모니 세력들에게 할당할 자원의 존재는 분명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에 필수적이다.
― 9장 공유지를 지향하는 경제와 사회를 향한 이행 제안, 135쪽

보편적 기본 소득과 같이 임금 노동과는 독립적인 수입원을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다면, P2P를 통해 사용가치를 생성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갈 수 있을 것이다. … 기본 소득은 빈곤과 실업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인간 공동체에 중요한 것이 되어줄 새로운 사용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어서도 유용한 수단이 되어줄 것이다.
― 1. P2P 생산의 정치경제학, 197~198쪽

노예제에서 봉건제로의 이행과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변동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두 가지 체계 모두 압축 성장의 위기에 직면한다. 즉 전자의 경우 로마 제국의 확장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었으며,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체계는 환경과 자원 위기에 직면해 있다.
― 2. P2P 생산 속 계급과 자본, 247쪽

현재 상업적 이용을 제한하지 않고, 완전한 공유를 허용하는 공개 라이선스는 자본의 코뮤니즘을 창출한다. 이는 개방된 지식, 코드, 디자인이 속한 영역이며, 현존하는 지배적 정치 경제에 포괄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영역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P2P 생산자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자율적인 P2P 생산의 영역이다.
― 3. 개방형 협력주의를 향하여, 277쪽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 새로운 공유의 시대를 살아가는 공유인을 위한 안내서』(데이비드 볼리어 지음,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우리 주변에 이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공유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종류의 공유 사례를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공유의 역사와 현재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운 사회 패러다임으로서, 삶의 방식으로서 공유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런 공유의 새로운 역할을 위해 우리가 공유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 『텔레코뮤니스트 선언』(드미트리 클라이너 지음,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4)


저자는 벤처 코뮤니즘의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자본주의 내로 문화를 포획하려 하는, 자유소프트웨어와 자유문화에 대한 기존의 자유주의적 관점과 카피라이트(copyright) 체제에 대해 비판한다. 클라이너는 카피파레프트(copyfarleft)를 제안하면서, 또래생산 라이선스의 유용한 모델을 제공한다.

  • 『마그나카르타 선언 ―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피터 라인보우 지음,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12)


저명한 역사가 E. P. 톰슨의 제자인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의 대표작. 인류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전제(專制)를 제한해 온 방책들 ― 인신보호영장, 배심재판, 법의 적정 절차, 고문 금지 그리고 커먼즈(the commons) ― 이 어떻게 축소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역사 속에서 잊힌 <삼림헌장>을 복원함으로써 커머닝의 역사를 복원한다.

  • 『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는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현대자본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금융자본이 아니라 인지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킬 수 있다.



책 리뷰 제임스 C. 스콧, 국가처럼 보기 2018/10/05 12:08 by 아콩카구아

정치학·인류학·삼림·환경학자인 제임스 C. 스콧의『국가처럼 보기 :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전상인 옮김, 에코리브르, 2010)를 소개한다. 우선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가 재미있어서 옮겨보았다. 스콧의 관심사가 하위주체의 저항방식에서 시작해 거대한 공공 계획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아둔다면, 앞으로 소개할 책 내용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래의 소개에서는 특히 양치기를 즐겨하는 저자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1936년에 태어났으며, 윌리엄스 칼리지를 졸업한 뒤 예일 대학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 그의 학문적 관심은 이른바 하위 주체들이 억압과 지배에 어떻게 저항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농민의 도덕경제: 동남아시아에서의 반란과 생존』(1975), 『약자의 무기: 농민 저항의 일상적 형태』(1985), 『지배와 저항의 기예: 숨겨진 사본』(1990) 등이 이와 관련한 그의 대표 저서이다. 따라서 스콧의 관점은 하위 주체들이 지배에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때때로 대비된다. 이후 그의 지적 흥미는 하이 모더니즘 거시 공공 계획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데, 이 책 『국가처럼 보기』(1998)가 이에 해당한다. 최근 『지배받지 않는 기술: 동남아시아 고원지대의 무정부주의 역사』(2009)를 펴내기도 했다. 연구와 교육 외에 즐겨 하는 일은 양치기인데, 이 역시 그의 세계관과 관련이 깊다. 실제로 키우다보면 양은 결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복종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한다. '순한 양떼'라는 관념은 지난 8000년간 인간이 양을 기르고 길들이는 과정에서 (잘못)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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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可讀性), 국가 통치술의 핵심

스콧은 ‘가독성’이 국가 통치술의 핵심 문제라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근대 국가는 통계조사를 한다든가, 도량형을 표준화하고, 도시를 설계하는 등의 “중앙 집권적인 차원에서 기록하고 감시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화된 격자를 창조”(21)하는 활동을 해왔다. 책 표지에는 위에서 내려다 본 격자 같은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스콧이 설명하는 근대 국가의 '하이 모더니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콧은 표준화를 통해 가독성을 높이려는 국가 규모의 사업으로, 18세기 후반 프로이센과 작센에서 진행되었던 ‘과학적 조림’ 혹은 ‘삼림의 과학화’를 예로 들고 있다. 당시의 공리주의 국가는 목재를 제공하는 상업적 의미의 나무에만 집중함으로써 목재의 생산량을 예측하고 안정적인 목재 공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숲을 지탱해주던 것은 덤불과 갖가지 동식물 등이 가졌던 '다양성'이다. 결국 국가는 생태계의 다양성을 희생시키고 관리의 효율성만 추구했기 때문에 ‘숲의 죽음(Waldsterben)’을 초래했다.

원래 삼림이 가지고 있었던 생명력과 복잡성은 사라지고, 어느 구역에 나무는 몇 그루고, 거기서 얼마의 목재가 생산되므로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라는 식으로 관념화된 숲을 상상하면 된다. 스콧은 ‘다양성의 최소화’, ‘대차대조표’, ‘지속 가능한 산출’이 당시의 세 가지 키워드였다고 말한다. 즉 국가 관리 삼림과학의 논리가 상업적 착취의 논리와 동일하다(39)는 것이다. 근대 공리주의 국가는 이처럼 ‘자연’을 단순화하고 읽을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자연자원’으로 바꾸었다.

삼림에서 덤불 등이 걷히고 나무들이 점차 단일한 품종으로 균질화되면 될수록 중앙집권적 관리의 가능성도 더욱 커졌으며, 이는 계획과 수확을 용이하게 했고, 더 나아가 조작과 실험을 용이하게 했다. 그러나 삼림의 두 번째 순환이 지나자 덤불, 쓰러진 나무, 고목, 곤충, 포유류, 조류 집단 등에 의한 다양성이 제거된 악영향은 명백해졌다. 삼림의 영양 사이클이 망가지고 목재의 등급이 하락한 것이다.

스콧이 보여주는 또 다른 국가계획의 예는 르코르뷔지에의 ‘하이 모더니즘 도시’ 설계, 그리고 르코르뷔지에의 비전이 현실화된 도시인 브라질리아의 사례다. 르코르뷔지에는 “거대하고 기계시대적(machine-age)이며, 위계적이고 중앙 집권적인 도시”(168)를 선호하였는데,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는 파리 중심부의 부아쟁 계획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업무 도시’ 계획, 리우데자네이루의 대규모 주택 단지 계획을 보면 알 수 있다.

르코르뷔지에는 심미적 이데올로기를 실제 도시계획에 표현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르코르뷔지에는 고전주의적 선, 즉 그가 “프랑스 특유” 의 선이라고 불렀던 “웅대한 직선, 웅대한 프랑스 열정”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것은 공간을 정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유력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대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수 있게 하는 가독성 높은 격자를 제공할 뿐 아니라 모든 방향에 걸쳐 무한대로 반복할수도 있는 것이었다(174). 

르코르뷔지에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유동하며 변화하는 실제의 도시가 아닌, 기하학적이고 관념적인 도시를 계획함으로써 공간을 그저 하나의 좌표 평면처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콧이 지적하듯, 행정적으로 정리가 잘 된 도시가 실제 그곳에서 걷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독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모든 건물이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그 건물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 도시는 오히려 보행자에게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반대로 행정적 관점에서 보면 혼란스럽고 복잡한 구시가지는 실제 도시의 거주자에게는 가독성이 높고 유기적이며 매우 효율적인 동선의 공간일 수 있다.

기술과 정치는 별개의 것이라고?

르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는, 스콧이 말하듯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과학적 진리 주장에 … 부여했던 모종의 절대적 권위”(180)라고 할 수 있다. 즉 르코르뷔지에에게 있어 ‘계획’은 정확하고 과학적이며 비정치적인 것이므로 여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데 딴지를 거는 법이나 민주주의, 국민의 의사결정 같은 것들은 모두 '사회적 장애물'이므로, 도시 설계에 있어 유일하고 정확한 해결책인 기술주의를 따라야한다는 것이다. 즉 도시계획은 오로지 전문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르코르뷔지에는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하이 모더니즘 도시계획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기술과 정치를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고, 그 중에서 기술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다른 의견, 다른 결정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이다.

스콧은 브라질리아가 르코르뷔지에의 도시 개념에 근접한, ‘거의 만들어진 하이 모더니즘 도시’로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브라질리아 건설은 1956~1961년에 인기 영합형 대통령 쿠비체크가 가장 좋아했던 프로젝트로, 1957년 설계 공모전을 열어 루키우 코스타의 스케치를 채택하면서 시작되었다. 브라질리아는 공공의 모임 장소가 될 만한 거리가 전혀 없고 오직 자동차용 도로와 고속도로만이 있는 도시다. 여기에는 정부 청사로 가는 도로에 둘러싸인 거대한 광장이 있는데, 심지어 군대 행진조차도 위축되어 보이게 할 만한 엄청난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스콧은 "여기에 비하면 톈안먼 광장과 붉은 광장은 차라리 아늑하고 정겹다"고도 표현하고, "만약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계획했다면 이는 차라리 고비 사막 한가운데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과 같을 것"이라고도 한다(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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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너무 커서 사람이 모일 수 없는 광장은 브라질리아의 도시계획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도식적이며, 관념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스콧은 국가가 도시를 계획함에 있어 실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나 역사적 맥락, 관행 등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과학적 삼림 관리에서부터 도시 개발에 이르는 예들을 볼 때, 국가계획은 공통적으로 자연이나 사회의 ‘복잡성’을 최대한 제거하여 ‘단순화’하고, 이를 통해 자연과 사회의 ‘가독성’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하이 모더니즘 공공 계획의 경향은 국가나 이념을 초월하여 반복되었다. 스콧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전문적 혁명가'들의 생각을 르코르뷔지에의 하이 모더니즘과 비교하고, 미국과 소련이 하나같이 집착했던 산업적 영농, 테일러주의 유토피아에서 하이 모더니즘적 발상을 읽는다.

실용적이면서 역동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스콧은 이 책의 후반부에서 각종 국가계획의 실패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된 얇은 그리고 형식주의적인 단순화"(445)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스콧이 볼 때 어떠한 사회적 과정도 기술자나 행정가가 생각해낼 수 있는 계획에 비해 훨씬 더 복잡다단한 것이기 때문에, '메티스' 같은 '토착적 전문지식', '민간 지혜', '실용적 기술', 테크네 같은 실용적 기술이 필요하다.

메티스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했다. 메티스는 영어로 '잔꾀' 또는 '교활한 지식'으로 번역되지만, 스콧은 이를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스콧에게 메티스는 "항상 변화하는 자연과 인간 환경에 적응해온 실용적 기술과 획득한 지회의 포괄적 영역"을 의미한다. 그가 강조한 것은 "첫째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상황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오디세우스의 능력이고, 둘째는 자신의 인간적 혹은 초인간적 적을 이해하고 능가할 수 있는 오디세우스의 역량"(472)이다. 이러한 메티스의 예로, 항해술, 연 날리기, 양털 깎기, 운전하기, 낚시, 긴급 구조, 권투, 레슬링, 펜싱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메티스를 국가 계획이라는 것에 적용시켜볼 수 있을까? 국가가 계획하려고 했던 대상은 어떤 관념적인 시공간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삼림, 아주 구체적인 혁명, 아주 구체적인 도시였다. 근대의 지식이나 국가가 모을 수 있었던 데이터들은 그런 구체성이나 특수성을 이해하기에 충분했을까? 오히려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메티스를 파괴하거나 배제하면서 제도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이 스콧의 의견이다.

과학과 근대성 그리고 발전에 대한 어떤 식의 이해가 오늘날 너무나 강력한 주류 담론을 구축한 나머지 모든 다른 종류의 지식을 낙후되고 정태적인 전통 혹은 노파들의 실없는 이야기나 미신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은 꼭 말하고 싶다. 하이 모더니즘은 수사적인 차원에서 스스로를 후진성의 해독제인 양 표현하기 위해 이러이러한 '타자' 혹은 이러이러한 '어둠 속의 쌍둥이'를 필요로 했다. 또한 이분법적 대립은 이들 두 가지 형태의 지식 언저리에 형성되는 제도 및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근대적 연구 기관, 영농 실험 연구소, 비료와 기계로 판매업자, 하이 모더니즘 도시 계획가, 제3세계 발전론자 그리고 세계은행 관계자는 우리가 메티스라고 불러온 실행지를 체계적으로 훼손함으로써 자신들이 제도적으로 성공하는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501)

계획가들은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책입안자나 설계자들은 모두 "내 꿈은 우리가 모두 파멸하는 거야!"라며 삼림이나 도시, 혁명을 계획했던 것일까? 스콧은 이러한 국가 권력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맞고, 정말로 "잘 살아 보세!"라며 계획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왜 항상 국가가 큰 계획을 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자연이나 사람들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하기는 커녕 그나마 있던 숲의 생명력이라든가, 시민들의 자생력까지 뿌리뽑아 버릴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거대한 하이 모더니즘 사례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비극이라고 판정할 만하다. 첫째, 상상력으로 무장한 지식인과 그 배후의 계획가들이 오만에 빠져 자신들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신이라도 되는 양 행동한 죄이다. 둘째, 그들의 행동은 부와 권력에 대한 추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진정으로 인간적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소망에 의해 고무되었는데, 바로 그런 소망이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 (…) 또 다른 이유는 하이 모더니즘적 신념의 세계적 보편성 때문이다. 우리는 식민지 개발 계획, 동양과 서양 모두의 계획된 도심, 집단 농장, 세계은행의 대규모 개발 계획, 유목 인구의 재정착 그리고 작업장에서의 노동자 관리 등 도처에서 다양한 외형을 가진 하이 모더니즘을 발견했다.

만약 그런 계획이 전형적으로 구사회주의 블록과 혁명적인 제3세계를 무대로 가장 극심한 인간적 및 자연적 희생을 초래했다면, 이는 그들의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이 대의 기관에 의한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저항을 물리치고 앞으로 돌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당성과 매력이 의거한 배후의 사상은 온전히 서구의 것이다. 한때 유일신의 작용으로 여겨지던 질서와 조화는 과학자와 공학자 그리고 계획가에 의해 제공된 진보적 사상을 믿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 (519~520)

위의 인용문에도 나와있듯이 국가의 계획이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마는 이유는 하이 모더니즘 신념이 권위주의적인 국가 권력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비극이 주로 사회주의 국가나 제3세계에서 더 많은 비극을 만들어냈다 해도, 그것을 지지해준 사상 자체는 서구에서 온 것이다.

스콧의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우연성'에 대한 강조다. 다시 말해 자연과 인간의 삶이 '우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콧도 말하고 있듯이 설계자나 행정관료들은 신이 아니다. "그러한 계획을 창시한 사람들은 실제 이상으로 자신을 똑똑하고 예측력 뛰어난 존재로 생각한 반면, 계획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실제 이상으로 똑똑하지 않거나 무능한 존재로 간주했다"는 것은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다. 스콧은 양치기이기도 해서, 양이 얼마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양도 고분고분하지 않은데, 사람은 얼마나 더 고분고분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계획가들의 예측은 아무리 정확하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이나 자연이 만들어내는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생각과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우연한 요소들 때문에 제도나 사회도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논문 리뷰 맥켄지 & 와츠먼, 무엇이 기술을 형성하는가 2018/10/05 11:39 by 아콩카구아

송성수 편역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 (1995) 중 도널드 맥켄지 & 주디 와츠먼의 「무엇이 기술을 형성하는가」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송성수 님이 밝혀두신 원문의 출처는 Donald MacKenzie and Judy Wajcman, "Introductory Essay", Donald MacKenzie and Judy Wajcman, eds., The Social Shaping of Technology: How the Refrigerator Got Its Hum(Milton Keynes and Philadelphia; Open Univ. Pr., 1985) 입니다.

맥켄지와 와츠먼은 “무엇이 사회적 영향을 가지는 기술을 형성해 왔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가장 유력했던 이론은 “기술이 독립적인 요소이며 기술 변화가 사회변화를 유발한다”고 주장하는 기술결정론이었습니다. ‘레저 사회’ 또는 ‘후기 산업 사회’를 초래한 것이 다름 아닌 기술변화라는 주장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116).

그러나 실제로는 특정한 사회의 성격이 기술의 채택 여부를 결정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점을 받아들이면 기술을 독립적 요소로 간주할 수 없게 됩니다(118). 같은 기술이라도 다른 환경,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효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프랭크족의 경우에는 등자가 봉건제를 유발했지만, 앵글로 색슨 영국의 경우에는 그러한 효과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술혁신은 사회 변화의 많은 조건들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기술을 형성한다” 혹은 “기술이 기술을 형성한다”고 주장합니다. 전자의 경우, 과학은 실재를 발견하는 것이므로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관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사회에 의해 심오한 차원의 영향을 받습니다. 또한 과학과 기술은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서로 반드시 긴밀하게 연결된 활동이 아니었으며, 과학과 기술의 연결이 증가한 20세기에도 과학이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기술도 과학에 공헌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술이 기술을 형성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기술의 발명은 특정 인물이 특정 날짜에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옥번과 토마스는 발명이 시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기술은 기존 기술을 점진적으로 변경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기술적 논리와 경제적 논리는 분리될 수 없다(131)는 점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많은 발명은 시스템 비용(역돌출)을 해결하기 위한 탐색과 시도로부터 이루어집니다(132). 기술 시스템이 직간접적으로 시장 경쟁에 연루되어 있는 경제적 성취라면 기술변화는 시장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133).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기업이 최대 이윤을 얻기 위해 특정 기술을 채택한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브하두리의 인도 농업 연구나 소련 산업의 혁신 연구를 볼 때, 사회마다 다른 ‘가치’ 및 ‘합리적 계산’의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술 또한 그것에 맞게 개발되고, 혁신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서 핵심 논점은 혁신의 ‘속도’가 아니라 질적 차이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기술의 성격은 자본가의 노동자 통제와 관련되지만, 경제 계산의 방식이 다른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술은 이것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138).

그러나 경제적 계산이 사회가 기술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발명을 이윤으로 전환 하는 일에는 긴 시간이 소요되므로, 이때 경제적 계산은 현재의 비용이나 시장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비용 및 시장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이때 기술혁신과 미래 이윤의 관계는 정량화 할 수 없는 것으로, 이때의 기술에 대한 투자를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목표로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위너는 기술 사용이 즉각적 수지타산과 무관할 수 있음을 미국 기업가 사이러스 맥코믹 2세의 기계 사용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이 기업가는 기계를 활용해 노동자를 해고하고 노동조합을 해체함으로써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한 것입니다. 국가의 경우 경제적 제한을 훨씬 적게 받기 때문에 큰 비용이 드는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기술형성의 중요한 예는 군사기술 및 여기서 비롯된 원자력, 항공 교통, 전자공학 등의 ‘민간’ 기술입니다.

이처럼 기술은 가치중립적 과학에 의해 형성되는 것도, 기술 그 자체에 의해 형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술 형성에 관해 분석하기 위해서는 맥켄지와 와츠먼이 제안하는 것처럼 기술 발명의 자원이 되는 기술 패러다임과 그것을 제한하는 기술 시스템, 사회의 가치체계와 그에 따른 경제적 계산 방식, 시장, 국가, 장기 지평을 염두에 둔 선택, 성의 문제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논문 리뷰 핀치 & 바이커, 사실과 인공물의 사회적 구성 2018/10/05 11:31 by 아콩카구아

트레버 핀치와 위비 바이커의 1984년 논문인 "The Social Construction of Facts and Artefacts: Or How the Sociology of Science and the Sociology of Technology Might Benefit Each Other"(사실과 인공물의 사회적 구성: 혹은 과학사회학과 기술사회학은 어떻게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 논문을 트레버 핀치, 위비 바이커 (송성수 옮김), 「자전거의 변천과정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해석」 이라는 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원문과 번역문은 구글에서 검색하면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핀치와 바이커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통합적 사회구성주의 접근법을 제안하기 위해 살펴봐야할 여러 논점들을 개관하면서 기존 문헌을 검토
  2. ‘통합적 관점’의 기원이 되는 두 가지 접근법, 즉 ‘경험적 상대주의 프로그램’(EPOR)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SCOT)을 논의
  3. 두 가지 접근법을 결합시키면서 경험적 사례를 제공
  4. 이 프로그램을 유익하게 추구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결론

이 글은 핀치와 바이커가 과학과 기술에 대한 통합적인 사회구성주의 접근법을 제안하기 위해 쓴 논문입니다. 이를 위해 과학학과 기술학에 관련된 세 가지 영역, 즉 과학사회학, 과학과 기술의 관계, 기술학 문헌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선 과학사회학과 관련해서 저자들은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만을 다룹니다. 즉 제도로서의 과학[과학자들의 규범, 경력 패턴, 보상 구조 등]이 아닌 과학 연구의 실제 내용[과학적 아이디어, 이론, 실험]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이지요.

1970년대 중반부터 지식사회학은 화학, 물리학,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hard sciences)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블루어는 과학도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일종으로 취급되어야 하며, 과학지식에 접근할 때에도 다른 지식을 분석하는 방법이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스트롱 프로그램(strong programme)'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블루어는 신념의 진위에는 ‘공정하게’ 접근해야 하며, 그러한 신념은 ‘대칭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Bloor, 1973). 조금 어려운 말이라서 위키백과의 설명을 가져와보면, "진리로 알려진 지식이든, 거짓이라고 알려진 지식이든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사회구성주의’라 부르는 이러한 접근법은 과학지식을 사회적 구성물로 취급하며, 이는 과학지식이 인식론적으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지식은 전체 지식 문화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문헌들 중 저자들이 주목한 것은, 기술이 과학을 응용한다기보다는 순수과학이 기술 발전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입장에서 접근한 연구자들의 논문입니다. 그러나 핀치와 바이커는 과학과 기술의 상호의존성을 측정하려고 했던 연구자들이 과학과 기술 자체가 다양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과학과 기술이 정확히 구분 되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잘못된 문제제기를 했다고 지적합니다.

이와 관련해 기술사학자 에드윈 레이튼(1977)은 “과학과 기술의 구분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라는 추상적 기능 사이의 구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사회학자인 베리 반즈(1982)는 “[과학과 기술] 두 영역의 실천가들은 … 다른 진영의 문화를 부분적으로 흡수하고 활용”하며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과학과 기술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문화로서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자원은 무엇이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경계는 사회적으로 협상되는 문제이며,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핀치와 바이커가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기술학 범주에는 혁신 연구, 기술사, 기술사회학 문헌이 포함됩니다. 이 중에서 첫째, 기술 혁신에 대한 연구는 기술의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혁신에 영향을 미치는 나머지 모든 요소를 고려하는데, 이는 단순한 ‘선형 모델’로 혁신 과정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둘째, 기술사 분야 문헌들은 ‘서술적 역사’가 지배적이라는 점과 분석의 비대칭성(실패한 기술혁신을 다루지 않음)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셋째, 기술사회학 영역에서 존스톤과 도시의 연구는 쿤의 패러다임 론에 입각하여 기술적 대상을 분석하지만, 이들 역시 분석의 비대칭성이 문제입니다.

멀케이에 의해 개진된 더 급진적인 사회구성주의적 기술사회학 연구도 있습니다. 멀케이는 거짓 이론이 성공적인 응용의 기초 가 될 수 있다(기술의 성공은 과학지식의 ‘참’과 아무 관련 없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핀치와 바이커는 멀케이의 결론 역시 부족하다며, 과학지식의 진위가 신념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기존 문헌들을 살펴본 후에, 핀치와 바이커는 과학지식사회학의 ‘경험적 상대주의 프로그램’(EPOR)과 기술사회학의 ‘기술의 사회적 구성’(SCOT) 접근법을 소개하고, 이 둘에 기초하여 과학학과 기술학의 ‘통합적 사회구성주의’ 프로그램을 제안하려 합니다.

먼저 EPOR은 다음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 실험이 한 가지 이상의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해석적 유연성’을 밝힙니다. 즉 특정 실험결과나 과학이론에 대해 관련된 사회집단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해석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2) 논쟁의 종결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논쟁종결기제, closure mechanism)을 분석합니다. 이것은 과학지식의 산출이 사회적 협상과정으로 이루어지는 논쟁종결기제를 통함을 뜻하는 것으로, 사회적 논쟁의 특징을 지닙니다. 3) 종결 메커니즘을 보다 넓은 사회구조와 연결 짓습니다. 과학지식의 산출 과정에서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논쟁의 종결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과학지식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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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 접근법에서는 기술적 인공물의 개발을 변이와 선택이 교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한 가지 예로 핀치와 바이커는 자전거의 발전 과정을 검토합니다. 19세기 중반 행위자 관점에서 자전거의 여러 변종들은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핀치와 바이커는 <Figure 1>처럼 자전거의 발전 과정을 선형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자전거 발전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 다방향 모델을 채택하고, ‘관련 사회집단’(남성, 여성, 노인 등 사용자 및 ‘자전가 반대자’들)이 제기한 문제와 해결책을 모두 고려하여 이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를 아래 <Figure 11>과 같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방식의 묘사는 모든 종류의 갈등을 보여줄 수 있고, 기술적 인공물이 안정화되는 정도 또한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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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바이커는 EPOR과 SCOT의 두 가지 접근법을 세 측면에서 연관 짓습니다. 첫째, 과학사회학의 EPOR 접근법이 과학적 발견의 해석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기술사회학의 SCOT 역시 기술적 인공물이 문화적으로 구성되며 해석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EPOR과 마찬가지로 SCOT 역시 두 번째 단계에서 논쟁이 종결되어 인공물이 안정되는 ‘수사학적 종결’ 및’ 문제점의 재정의에 의한 종결’ 메커니즘에 대해 논합니다. 셋째, 과학사회학 연구에서는 사회정치적 환경과의 연결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으나, SCOT 설명 모델은 사회집단이 기술적 인공물에 부여하는 의미에 주목하는 진전된 모습 보여줍니다.

핀치와 바이커는 결론에서 이 두 가지 접근법이 유사성을 가지며, 과학지식사회학이 기술사회학 연구에 적절한 시각을 제공해야만 하고, 기술학 역시 기술에 관련된 사회집단을 분석했던 방법을 과학사회학에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학과 기술에 대한 ‘통합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술적 인공물이나 과학적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은 이제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즘 '제 4차 산업혁명' 같은 것을 이야기 할 때, 기술이 자기만의 논리만으로 저절로 발전해가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보게됩니다. 그렇기에 핀치와 바이커의 이 고전적인 논문을 한 번 쯤은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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